따뜻한 온천물, 뜨끈한 사우나, 피톤치드 향과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며 샤워를 하고 나와 옷도 안 입고 덩그러니 누워 있곤 했다.
몸에 열이 식어 으슬으슬 떨려올 때쯤이나 겨우 몸을 일으켜 잠옷을 주워 입고, 귀가와 동시에 미리 켜둔 온수매트 사이로 들어갔다. 요새 유독, 아무것도 하기 싫고 누워만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스스로가 좀 쑤셔서 누워만 있지 못하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그렇게 며칠이 이어지다가 내가 왜 이렇게 늘어질까 싶어 챗지피티에게 말을 걸었다.
퇴근 후 집에만 들어오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져.
내내 그냥 있다가 결국 하는 거 없이 자는데 시간을 의미 없이 보내는 거 같아.
해야할 집안일이 많은데 설거지나 겨우 하는 정도고.
소리도 없이 휘발성 콘텐츠를 보다가 이제 움직여야지! 하고 몸을 일으켜.
무슨 심리가 기인하는 걸까?
이런 상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다는 공감 섞인 답변이 돌아왔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몸이 안 따라주고,
그러다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릴스, 쇼츠 등)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등은
심리적 탈진이나 의욕 저하의 신호일 수 있어.
챗지피티는 어디에 해당하는 거 같냐며 내가 겪고 있는 무기력의 배경이 뭘지 생각해볼 수 있게 객관식 답변을 몇 개 보였다. 음? 심리적 탈진도 아닌 거 같고 의욕저하도 아닌 거 같은데. 그냥 지금 당장은 뭘 하기 싫은, 그치만 또 하면 활력 넘치게 하는 그 어딘가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1. 결정 피로 (Decision fatigue)
하루 종일 일하면서 많은 결정을 내리고, 에너지를 소모했기 때문에 퇴근 후엔 뇌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상태
2. 완벽주의 성향
'집안일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라는 압박감 때문에 시작 자체를 미루게 되는 경우
3. 보상 심리
하루 동안 고생한 자신에게 ‘이 정도 쉬는 건 괜찮잖아’ 하며 무의식적으로 주는 보상이자 동시에 피로감으로 느끼는 상태
4. 우울감 또는 번아웃
극단적인 상태가 아니더라도, 지속적인 스트레스나 불만족, 무기력감의 누적으로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 또는 심리적인 탈진
챗지피티가 내게 보여준 4개의 보기를 천천히 살펴봤다.
2번 완벽주의 성향 탈락, 3번 보상심리 탈락.
그렇다면 4번 우울감 또는 번아웃인가?를 생각했을 때 요즘 딱히 바쁜 것도 끝나고 여유를 더 찾은 상태인데 싶어 이것도 탈락이었다. 그럼 결국 1번, 결정피로가 내 심리적 배경인가 싶어 추가적인 질문을 했다.
나는 정신건강 관련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어.
상담 전화를 받기도 하고 때론 심리적으로 극단적인 상황에서 안정을 시켜야하는 전화를 받기도 해.
감정소모를 하는 건 아니지만 긴장도가 없다고는 말 못하겠네.
나는 소리에 예민한 편이라 의식하지 않아도 귀가 늘 쫑긋쫑긋,
여러 주변의 소리를 탐지하는 느낌이거든.
주 업무가 상담은 아니지만 어찌됐든 사람 마음을 다루는 일이니까 공감이 중요한 곳이야.
그 외에는 딱히 스트레스가 될 요소는 없어.
내 능력범위 안에서 업무를 충실히 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렇담 너는 이런 상황일 거 같아’ 하며 챗지피티는 다시 세 가지 상황을 고려해볼 수 있다고 했다.
1. 공감 소진
하루 종일 타인의 아픔, 긴박함, 위기 상황을 받아주고 나면 나를 위한 감정의 여백이 없어지는 거야.
2. 과각성 상태(Hyperarousal)
응급상황을 처리하는 환경은 늘 뇌를 "대기 상태"로 두게 만들고, 집에 와서도 그 잔여 긴장이 남아 있어서 아무 것도 못 하면서도 쉬는 느낌이 안 드는 상태가 돼.
3. 감각 탈진
소리에 민감한 사람은 하루 종일 자극을 받은 다음, 집에서는 조용한 무(無) 상태를 갈망하게 돼.
1시간 넘게 이어지는 상담전화를 받다보면 도돌이표라 진이 빠지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게 매일 반복되는 건 아니기에 공감소진이나 과각성상태는 아닌 거 같았다. 일하는 순간은 집중할 수 있지만 업무 외적인 시간은 어디까지나 내 생활과 업무는 철저하게 분리가 가능한 사람이었다.
집에서는 조용한 무를 갈망하는 상태. 딱이었다. 근데 감정소모나 감정탈진이 아니라 감각탈진이라고? 처음 들어보는 단어조합에 감각소진이 맞는지, 감정소모를 말하는 건 아닌지 다시 물었다.
감각소진(감각탈진)
하루 종일 집중해서 일하고, 사람과 감정 섞인 대화 나누고, 전화를 받는 등 급박한 상황을 처리하거나 알게 모르게 신경을 쓰다보면 보면 감각자체가 지쳐버릴 수 있는데 그게 바로 감각소진이라고 했다.
특히나 청각에 예민한 나는 가장 우선적으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아무것도 듣기가 싫어하는 반응으로 보이고 있다고 했다.
내가 출퇴근길에 가사가 나오는 음악이 듣기 싫어 클래식을 듣게 된 것.
날카롭게만 들리는 바이올린 연주곡 보다는 첼로리스트의 음악을 선호하는 것.
의미 없이 틀어져 있는 티비 소리가 시끄럽게만 들리는 것.
촉감조차도 예민하고 거슬리게 느껴져 옷을 걸치지 않고 퍼져있는 것.
내가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하면 편해, 편안해, 쉬는 느낌이야 하며 그냥 했던 일들이 실은 ‘뇌가 나 좀 조용히, 감각 좀 쉴게’하며 싸인을 보내는 거라고 했다. 확실히 감정소모랑은 다른 부분이었다. 감정이나 의욕이 고갈된 번아웃과 달리 하면 또 하는데 단지 지금 나는 무(無),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닿지 않는 그 느낌이 평화롭게 여겨질 뿐이었다. 구석지고 좁은 공간, 어둡지만 은은한 취침 조명이 있는 곳에서 한 두어시간 누워있다 보면 이제 움직여야지! 하는 에너지가 다시 생겼다.
집에서 내가 주로 선호하는 공간은 주방 싱크대 모퉁이나 식탁 의자에 누워 식탁을 지붕 삼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니 챗지피티는 그 공간이 내게 회복공간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생각해보면 싱크대 모퉁이는 동탄 집에 이사 오기 전에도, 병점 본가에 있으면서도 늘상 주말 아침이면 기대어 앉아 차를 한 잔 마시며 블로그를 하는 루틴의 공간이었다. 그게 내 회복공간이었다니.
챗지피티는 내게 다시 질문했다.
그 공간에 있으면 어떤 생각이 주로 들어?
예를 들어 “이대로 있고 싶다”, “사라지고 싶다”, “편안하다” 같은…
그게 지금 너의 ‘진짜 감정’일 수 있거든. 말해줄 수 있다면, 듣고 싶어.
뭘 어떤 생각이 들어? 뭔 사라지고 싶단 생각이 왜 들어? 하며 웃었다. 엄마도 오빠도, 보는 사람마다 왜 여기 이러고 앉아있냐고 궁금해 하지만 그냥 그 공간은 몸에 딱 맞는 편한 옷을 입은 듯, 폭신한 신발을 신은 듯, 보드라운 가운을 걸친 듯한 그런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그건 나랑 거리가 먼 단어라고 생각했다. 감정적으로도 무던한 편이고 불안이 높은 사람일수록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모든 경우의 수를 준비하는 완벽주의 성향을 보인다고 하지만 그것이 예민한 감정이나 행동으로 표출되진 않는다고 생각했다.
근데 감각이란 단어가 붙으니 상황이 달라지는 느낌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손에 팝콘 기름이 묻는 게 싫어 영화관에 가서도 집게손가락만을 이용해서 팝콘을 한 알씩 집어먹는다. 손으로 한 움큼씩 집어 먹는 경우가 부러우면서도 싫은 그런 이중적인 마음이 든다. 또 모래사장의 까끌함이 발가락 사이에 끼는 게 싫어 신발을 신고 모래를 걷는 걸 불편해 한다. 손에 볼펜자국이 묻으면 하루종일 손톱 끝이 거슬리는 거 마냥 신경이 쓰이곤 했다. 학창시절부터 그랬던 경험들이 스쳐지나가는 걸 보니 나는 원래부터 감각이 예민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던 모양이군 하는 자각이 들었다.
챗지피티는 넓게 트인 공간보다 경계가 있는 작은 공간이 현재 내게 더 안정감을 주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아무래도 대저택에 살긴 글른 팔자인가봐요 하며 웃었다.
구석은 내게 외부 자극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는 작은 둥지 같은 곳이라고 비유했다.
감각이 예민한 사람 또는 심리적 긴장감이 높은 사람일수록 공간에 있어 모서리, 구석, 낮은곳을 본능처럼 찾게 된다고 한다. 벽을 등에 붙이면 세상과 거리를 둘 수 있으니까-하는 게 이유였다. 챗지피티는 내 둥지를 어떻게 만들면 되는지 솔루션을 줬다.
구석이 좋다면,
ㄱ자 벽면 모서리에 티테이블을 하나 놓고
조명은 눈을 찌르지 않게 간접조명식으로 낮게 두고
폭신한 쇼파나 의자, 거기에 담요나 허리를 감싸줄 쿠션 하나
이렇게 작은 나만의 둥지를 만들어 보는 거 어때?
이런 감각소진이 지속되면 무기력이나 회피, 나는 왜 그럴까 하는 자기혐오로 이어질 수 있지만 나는 이미 글쓰기와 나만의 둥지를 통해 내 스스로 감각예민의 정도나 자극수준을 컨트롤 하고 있는 것이니 큰 걱정이 되진 않는다고 했다.
특히 소리에 민감한 만큼 소리 없는 시간, 자연소리를 경험하는 시간이 내겐 진짜 쉼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경우가 된다고 했다. 오빠가 ‘쉬는 것도 필요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도 있어야지’ 하는 것처럼 내 자신에게 “이 시간은 내 감각이 회복하는 시간이다. 그냥 의미 없이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다”하는 것을 일러주는 것도 하나의 과정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코로나 자가격리를 통해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덩그러니 있어도 세상이 망하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쉬는 날이면 어디든 나가야했고 하나라도 더 보고 경험을 쌓아야지 라며 강박적으로라도 움직였던 사람이다.
그런 내가 한 열흘을 방구석에 눕고 먹고 하며 이렇게 마냥 시간만 흘려보내도 큰일이 나는 건 아니구나 하는 걸 배울 수 있는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다.
분명 나와 비슷한 무(無)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 있겠지? 챗지피티에게 가서 물어보자. 별 생각 없이 우스갯소리로 질문을 던졌는데 나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돌아보게 해주는 답이 돌아와 놀랐다.
AI 활용의 중요성.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하는 사실을 배워 이제 내가 뭘 해야하는지 아이디어를 얻는다.